Memorial

오당 오봉국 교수님을 추모하며

한재용 1 , https://orcid.org/0000-0003-3413-3277
Jae Yong Han 1 , https://orcid.org/0000-0003-3413-3277
Author Information & Copyright
1서울대학교 농생명공학부 교수
1Professor, Department of Agricultural Biotechnology and Research Institute of Agriculture and Life Sciences,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08826, Republic of Korea
To whom correspondence should be addressed : jaeha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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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line: Dec 31, 2022


폭염이 지나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2022년 9월 1일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의 오당 오봉국 명예교수님께서 향년 97세로 별세하셨습니다. 그날 아침 일찍, 둘째 따님은 저에게 전화를 주시면서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별세하셨다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열흘 전쯤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건강하고 동네에서 산책까지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은 너무나 충격이었고 선생님의 그동안의 발자취와 함께 하였던 추억과 상념이 떠올라 마음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한국 가금유전육종학 분야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발전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한국 가금산업의 역사로 자타가 인정하였던, 한국인의 밥상을 바꾼 주역이 바로 오봉국 교수님이십니다. 후학양성을 위해 평생 불철주야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제자들의 큰 스승이시자 후배에게는 귀감이 되셨던 탁월한 교육자이고, 저에게는 항상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진정한 멘토이자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학부 2학년 때로 근엄하신 교수님 모습이 어렵게만 느껴졌었습니다. 그 후 3학년 때에 “가금학”과 “가금번식육종학”을 배우면서 선생님의 구수한 수업에 매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부 4학년 때 교수님의 권유로 경상대에서 열렸던 전국 대학생 학술논문 발표대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름방학을 가금학 연구실에서 계속 머무르면서 당시 대학원생이셨던 최연호 선배님의 지도를 받아 나름대로 자료를 정리하여 논문을 작성하면서 참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부족함이 많았음에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고, 그 일을 계기로 처음으로 연구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엄하게만 느껴왔던 교수님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고, 한없이 따스하신 인자함에 매료되어 결국 가금학실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인생의 동반자인 닭과의 삶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오봉국 교수님은 저를 닭과 평생의 동반자로 맺어주신 고마운 분이 되셨습니다.

선생님은 학문뿐만 아니라 제 삶의 스승이셨습니다. 저희 부부의 결혼식 때 선생님은 주례사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말씀해 주셨고, 저희 부부는 지금도 이를 실천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봉국 교수님 후임으로 부임한 후 코로나 팬데믹 전까지는 1-2개월마다 임정묵 교수를 포함한 동료 교수와 함께 찾아뵙고 식사를 하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선생님은 언제나 편하게 저희들을 대하시면서 삶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시곤 했습니다. 단지 작고하시기 6-7년 전부터는 즐기시던 반주를 자제하셨고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외로움을 느끼신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생각이 너무도 혁신적이시고 후학을 위해 노고를 마다않는 진솔한 모습에 저희 모두는 선생님을 만나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곤 했습니다. 선생님과 같은 스승님을 가까이 모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상의드리면서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저희들은 복과 행운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봉국 선생님께서는 평남 진남포에서 1925년 10월 28일 출생하셨고 만주 봉천 동광중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한국전쟁 때 남하하여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문부 및 축산학과를 1952년에 졸업하셨습니다. 1955년 도미하셔서 1957년까지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Shoffner 교수의 지도하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시고 귀국하신 후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으셨습니다. 그 후 1965년에는 호주로 파견되어 호주 시드니 대학교에서 1968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1952년부터 유급조교 발령을 시작으로 서울대에 부임하신 선생님은 1991년 정년퇴임까지 40년간 대학에서 교육자의 길을 걸으시면서 후학양성에 진력하셨습니다. 또한 학교 발전을 위해 농과대학 학과장, 도서관장, 학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봉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봉국 선생님께서는 후학양성뿐만 아니라 학문발전을 위해 한국가금학회 및 관련분야 학회 활동에도 열과 성을 다하셨습니다. 가금유전육종학 연구의 위상이 지금처럼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 데는 선생님의 헌신과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가금육종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1957년 12월에 귀국하신 후 직접 도입하신 미네소타 근교계통 종계를 활용한 실용계 육종개발 사업 공동연구 및 한국양계산업 진흥을 위해 가금연구회를 1958년 조직하셨습니다. 가금연구회를 모체로 1971년 세계가금학회 한국지부를 결성하였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시면서 발전을 이끌어 1973년 세계가금학회로부터 정식회원국 승인을 받게 만드셨습니다. 이어서 1983년 선생님께서는 한국가금학회를 창립하시면서 국내 가금학 연구 및 산업 분야의 발전을 이룩하십니다. 1990년에는 세계가금학회 아시아태평양지역 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시면서 1993년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된 제5차 아시아 태평양가금학회를 주관하셨고 이를 계기로 한국의 발전된 가금연구와 가금산업을 세계 각국에 소개할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한 가금분야 학문 발전에 크게 공헌한 학자를 격려하기 위해 한국가금학회에 거금을 출연하셔서 오당학술상을 제정하도록 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학문적 역할은 후학들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해 줌은 물론 국제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데 커다란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1981년부터는 학자로서 최고명예인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 되셨으며, 한국농업과학협회장, 한국축산학회장, 한국육종학회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한국의 축산분야 및 육종연구 발전에 기여와 후학을 양성해 주셨습니다.

오봉국 선생님이 1957년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당시 미네소타대학에서 개량한 근교계통원종계 백색레그혼종, 뉴햄프셔종, 백색플리모스록종 등 3품종의 종란 1,300개를 국내에 도입하셨습니다. 이는 동 대학의 가금학과 학과장 E.L. Johnson 박사와 지도교수인 R.N.Shoffner 교수님의 배려와 미국의 경제원조기관인 ICA 후원에 의해 가능했는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실험목장에 입식된 종란은 우리나라의 양계산업의 발전의 바탕이 되었으며 고유의 고능력 종계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마치, 문익점(文益漸)선생의 목화씨 도입이 우리나라 목화 재배의 계기가 되었듯이 한국전쟁으로 폐허화된 우리나라가 우수한 원종계를 확보하여 가금 계량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며, 이를 계기로 실용계 F1을 만드는 공동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농가용 산란계가 보급하게 되었으며, 축산시험장과의 공동연구로 산란용 종계를 육성·보급하고 이와 관련된 연구논문을 다수 발표하셨습니다. 한편 한협가금육종회사와 산학협동 공동연구 사업을 통하여 개발한 ⌜한협603⌟ 및 ⌜한협 607⌟ 품종을 개발하셨는데, 그중 한협 603호는 처음으로 국산 육용종계로 개량된 품종으로 당시 전 육계사육수수의 40~5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선생님은 우리나라 양계산업의 큰 기초를 마련하셨습니다.

⌜새로운 양계⌟를 저술하여 양계기술을 농가에 보급하는데 앞장서시고, 1959년부터 매월 서울에서 양계강습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양계기술과 양계경영의 효율성을 제고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술지도 발간하시면서 산-학-연 협동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가금협회 개최로 지방순회 양계강습회를 실행하여 농가에게 기술 보급을 하셨습니다. 1962년에 선생님은 장안동 양계강습회와 가금연구회 회원을 중심으로 부화, 종계업을 하는 중견인사와 각 지역 양계인들이 모여 한국가금협회(현, 양계협회)를 창립하는데 산파역할을 하셨습니다. 1964년 12월 농축정(農畜政) 1161, 12-1892호)에 의하여 정식으로 한국가금협회 설립허가를 얻었으며 1968년 가금협회 회장으로 선생님이 취임하신 후 “월간양계” 잡지를 1969년 11월에 창간하셨는데 그 잡지는 새로운 사양관리 기술의 보급과 양계지의 대변지로 자리매김에 성공해 가금산업 발전에 큰 공헌은 물론 지금까지도 활발한 발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퇴임 후에도 양계협회 상임고문으로 일하시면서 1991년 10월에 축산분야에서는 처음으로 91한국양계박람회를 추진하여 우리나라 산업계 및 농가가 외국의 선진화된 기술과 시설투자에 필요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정부에서는 국제경쟁력을 배양하는 차원에서 축산업 규모확대와 전업화 시책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양계산업에 있어서는 그 당시 시설의 자동화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때마침 양계박람회가 개최되면서 외국 기업이 많이 참여하였고 선진외국의 자동화시설을 많이 전시하여 국내 양계인들이 외국에 가지 않고도 많은 첨단 자동화시설을 비교분석하고 주문 상담을 편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 박람회는 가금 산업계가 한 단계 기술적 도약을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1999년도부터 이 행사를 모태로 전 축산업계가 참여하는 한국국제축산박람회가 개최되었고 제1회 축산박람회의 추진위원장을 선생님께서 맡아서 성공적으로 행사를 진행하셨습니다.

축산 발전을 위한 선생님의 엄청난 기여는 선생님의 존경받는 인품의 결과로 학계와 산업계는 물론 정부를 움직이는 리더십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농림부를 설득하여 1994년부터 “재래닭의 고품질 육용화 연구” 사업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였습니다. 외국개량종이 능력이 우수하여 우리나라의 육용계 시장을 우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재래닭은 국민식성에 알맞은 독특한 맛과 육질로 인하여 고가로 판매되고 있으나 품질의 균일성이 없으며 산란성, 산육성 등 경제형질의 개량도가 낮아 생산비도 높았습니다. 재래닭의 계통조차도 확립이 안 되어 산업화도 곤란한 실정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재래닭을 이용한 차별화된 축산물 개발을 위해 재래닭 복원과 계통을 확립하고, 계통이 조성된 재래닭을 기초로 우량교배조합 검정사업을 수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수한 경제형질을 가지는 교잡종 닭을 만들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이 농가소득 향상과 직결되는 산업화도 모색하셨습니다. 수입자유화에 대응하는 특수 축산물 생산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농림부의 용역사업은 그 당시 아주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연구책임자는 선생님께서 맡으셨고 부총괄 책임자는 작고하신 충남대학교 한성욱 교수이셨고 저도 세부과제 책임자로 참여하였습니다. 1994년에서 1997년까지 4년간에 투입된 총 연구비는 약 8억 2천만이었으며 재래닭 특징을 지닌 닭을 수집하여 재래닭 기초계군을 만들고 1차적으로 DNA검색으로 개량종의 피를 갖고 있지 않은 닭을 선발 후 외모특징에 따라 적갈색, 황갈색, 흑색, 백색 등 4가지 계통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들을 계통 번식하여 1차적으로 특징 있는 재래닭을 복원하였습니다. 현재에도 농촌진흥청 축산과학원은 그 때 개발한 재래닭의 씨닭을 보유하고 있으며 FAO에도 공식적으로 품종이 등록되었고 이 씨닭을 기반으로 농가 보급용인 우리 맛닭을 개발하여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습니다.

학계는 물론 산업계와 정부까지 아우르셨던 선생님은 헌신적인 마음 씀씀이와 함께 항상 창조적이며 솔선수범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범접할 수 없는 업적은 인격과 덕성, 원만한 성품에 기초하며 봉사의 마음과 의리를 지키시는 모습은 후학들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교육, 연구 및 봉사 부문의 큰 성과로 선생님은 학계와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1972년 농수산부장관 공로표창, 1982년 국민훈장 석류장, 1990년 미국 미네소타대학으로부터의 Outstanding Achievement Award 수상, 1991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1년 대한민국 학술원 학술상 및 2003년 한국가금학회 공로표창 등 많은 수상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한국전쟁으로 불모지와 같았던 한국의 가금학과 가금산업에 선구자로서 결정적 기여를 하신 이 시대의 큰 학자로 또한 큰 스승으로 영원히 존경받으며 기억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거룩한 뜻과 큰 열정 그리고 후학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인품은 저희 모두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적 등불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선생님께서는 그토록 애정을 가지고 가르침을 주신 후학들이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축산학과 가금학 발전에 매진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인자한 미소로 지켜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삼가 영원한 스승님, 오당 오봉국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부디 편하게 사모님 곁에서 영면하시기를 기원합니다.